호조벌 가을 들판에 고개숙인 벼이삭이 바람에 따라 일렁이는 모습과 그 소리를 보고 듣는 즐거움...

관람시기

9월~10월

주변 주요 유적지

관곡지 (시흥시 향토유적 제8호)
조선 전기의 명신이며 농학자로 이름이 높은 강희맹 선생이 중국 남경의 전당지에서 연꽃씨를 채취해 귀국한후, 하중동 관곡에 있는 연못에서 재배를 해본 결과 널리 퍼질 수 있었다고 한다

위치

시흥 매화동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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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7.5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시흥 하중동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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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7.5 | 지도 크게 보기 ©  NHN Corp.

대중교통

  • 소사역에서 63,마을버스1-1번 이용
  • 부천역에서 61번버스, 38번버스 이용
  • 영등포역에서 6640번버스 이용, 오이도 역에서25번 버스 이용

자가용

서해한고속도로 목감 IC- 하상동 신도시(시흥등기소) 방향

대표음식

진주성찬, 조가네뼈감자탕, 한미루, 등대횟집

관광자료

호조벌은 조선 경종 1년(1721) 무렵에 완공된 호조방죽으로 인하여 형성된 시흥시 중부의 넓은 벌판을 말한다. 간척사업으로 하중동과 포동에 방대한 농경지가 새로 조성되었고 이를 농민들에게 경작하게 하였다. 시흥의 곡창지대인 미산ㆍ 은행ㆍ 매화 ㆍ하중ㆍ하상ㆍ물왕ㆍ광석ㆍ도창ㆍ포동 등의 농경지 대부분이 이때 조성된 농경지인데 호조에서 막았다하여 호조벌 , 호조들, 호조방죽 이라고 부른다.

문헌자료

신천동에서 39번 국도를 따라 시청 쪽으로 오다 보면 미산동ㆍ포동을 지나며 왼쪽으로 드넓은 벌판이 펼쳐진다. 말 그대로 훤히 뚤린 평야인데, 이 곳을 이곳 주민들은 호조벌이라 부른다. 호조벌에서 ‘호조(戶曹)’란 조선시대 6부의 하나로서 국가의 경제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관청을 말하는데, 수도에서 떨어져 있는 이곳에 ‘호조’란 이름이 붙었으니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호조벌의 맞은 편으로는 포동ㆍ방산동과 장현동ㆍ장곡동 사이에 넓은 내만갯벌이 펼쳐져 있고, 1930년대에 만든 옛 소래염전이 그 위에 자리 잡고 있다. 1910년대에 만들어진 지형도를 보면 갯벌을 통해 바닷물이 들어오다 현재의 39번국도 앞에서 막힌 상태를 잘 볼 수 있는데, 이 바닷물을 막아서 생긴 것이 바로 호조벌이다. 간척사업하면 대개 20세기 이후, 특히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우리나라 간척사업의 역사는 그 뿌리가 아주 깊다. 멀리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강화로 천도한 후 만든 좌둔전ㆍ우둔전에서부터 조선시대에도 여러 곳에서 농토를 확보하기 위한 간척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호조벌을 막은 둑을 ‘호조방죽’ 또는 ‘걸뚝’이라 하는데 지금까지는 대개 조선 정조때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에 행차하는데 따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전해져 왔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사실과 다르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등 관련기록을 검토해 보면 정조대가 아니라 1721년(경종 1년) 무렵에 호조벌이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갯벌을 경계로 포동쪽은 인천부에, 장현동 쪽은 안산군에 속했는데, 『승정원일기』경종1년 12월 6일에는 “안산과 인천 두 읍의 경계에 둑을 쌓아 논으로 만들만한 곳이 있는 까닭으로 따로 감관(監官)을 정하고 군정(軍丁)을 고용하여 일을 시작하여 지금 이미 완성하여 끝냈으니, 서울 근처에서 이렇게 수백석을 얻는 논을 얻었으니 진실로 다행한 일입니다” 라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경종 3년(1723) 5월 25일에는 인천과 안산 사이에 새로 쌓은 둑이 범람하여 큰 피해를 입어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1750년대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인천부에는 ‘진청신언(賑恤廳新堰)’, 즉 ‘진휼청에서 새로 만든 둑’ 이라는 표기가 있는데 진휼청이 호조(戶曹)의 관할 아래 있었던 점을 보면, 주민들이 ‘호조벌’, ‘호조방죽’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함을 알 수 있다. 바닷물을 막아 농토를 만드는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데, ‘호조방죽’을 쌓을 때도 마찬가지였는지 이와 관련한 애처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즉 둑을 쌓아도 곧 무너져 내려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하였는데, 홀연히 나타난 스님 한 분이 산 사람을 둑에 묻어야 무너지지 않고 성공할 수 있다하여 고을 수령이 서울의 금부도사에게 편지를 보내 사형수 세 명을 데려왔고, 그들을 공사현장에서 사형집행하여 무사히 둑을 완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가 전하듯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자연 지형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농경지를 만들었던 우리 조상들의 경험은 그 뒤에도 계속되어 시흥 곳곳에 간척을 통한 대규모 토지를 만들어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