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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HEUNG CITY사이버역사관

고문서로 본 시흥

윤민헌 가문의 교지

  • 윤민헌(尹民獻, 1562~1628) 일가는 경화사족(京華士族)으로 일찍이 안산(安山 : 현 시흥시 산현동 일대)에 정착하여 세거한 명문 가문이다. 이들 일가는 서인(西人), 노론(老論)의 당색을 이어나갔는데, 이는 윤민헌이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일가의 인물들은 관직생활을 하면서 정국 변화의 영향을 받아 외방으로 물러나거나 향리로 퇴거하기도 하고 심지어 파직을 당한 경우도 있었으나, 대체로 가문이 정치적으로 큰 몰락을 겪지 않고 자손 대대로 꾸준히 관직을 이어나갔다.
    파평 윤씨 윤민헌 가문의 고신류 자료는 17세기 초(1609년)에서 19세기 후반(1876년)까지 무려 260여 년의 기간을 포괄하고 있으며, 분량도 110점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규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특히 윤민헌으로부터 윤완(尹琓, 1817~?)에 이르기까지 장장 10대에 걸쳐 자료가 끊이지 않고 전해 내려왔다는 점에서 가치와 의의가 깊다. 조선왕조에 있어서 어느 한 일가가 정치적 몰락 없이 이렇게 꾸준히 가세(家勢)를 유지하는 경우도 드문 듯 하다.
  • 고신(告身)은 문구 관원의 임명장(任命狀)으로 크게 4품 이상에게 국왕이 직접 내린 ;교지(敎旨)‘와 왕명을 받들어 이조(吏曹 : 문관 임명)와 병조(兵曹 : 무관 임명)에서 내린 ’교첩(敎牒)‘으로 나뉜다. 또한 조선왕조는 외명부(外命婦)라 하여 문무 관원의 처(妻)나 모(母) 등에게도 품계를 내렸는데, 이때에는 남편이나 아들의 품계에 준하였다.
    이밖에 과거 합격자에게 내린 합격증도 교자라 하였는데, 문˙무과 급제자의 경우 붉은색 종이를 사용하였기에 ’홍패(紅牌)‘라 하였고, 생원(生員)˙진사(進士) 및 잡과(雜科) 입격자의 경우 흰색 종이를 사용하였기에 ’백패(白牌)‘라 구분하기도 하였다.
  • 이 중 여기에 전시하는 자료는 현종 2년(1662) 9월 아들 윤강(尹降)의 승진으로 인해 윤민헌에게 내려진 추증교지(追矰追矰)와 숙종 10년(1684) 이조(吏曹)로부터 윤민헌의 손자인 윤재(尹宰)에게 내려진 교첩(敎牒), 윤강의 둘째 아들 윤지선과 셋째 아들 윤지완(尹趾完)이 각각 좌의정(左議政)과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임명됨에 따라 숙종 23년(1697) 윤강에게 내려진 추증교지(追矰追矰), 그리고 영조 15년(1739) 윤강의 맏아들 윤지미(尹趾美)에게 내려진 추증교지(追矰追矰) 등 4점이다. 이들 자료는 조선 후기의 정치사 및 인물 ˙ 가문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특히 서울 인근의 사족(士族)의 거향(居鄕) 양상과 변화상을 규명하는 데에도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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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헌 가문의 교지 - 연도, 제목, 수급품직, 비고
연도제목수급품직비고
현종3년(1662) 尹民獻
追贈敎旨
贈崇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判義禁府事 知經筵春秋館
成均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五衛都摠府都摠管
숙종10년(1684) 尹宰 敎牒 通德郞 윤민헌의 손
숙종23년(1697) 尹絳
追贈敎旨
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 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
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윤민헌의 자
영조15년(1739) 尹趾美
追贈敎旨
贈通政大夫 弘文館副提學 知製敎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윤민헌의 증손

‘관곡지’ 관련 고문서

  • 시흥시 하중동에는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관곡지(官谷池)‘가 있다. 이 연못은 조선 전기의 유명한 관료인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경(南京)에서 꽃은 희고 끝부부만 옅은 붉은 빛을 띠는 ’전당홍(錢塘紅)‘ 연꽃씨를 가져다 심은 곳으로 유명하다. ’관곡지‘는 단순히 장소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이 연못의 지역 내 위상과 관리방식, 연지기[蓮直]의 존재 등을 전해주는 서목(書目), 완문(完文) 등 고문서들이 함께 전해지고 있어 그 의의를 더하고 있다.
  • 고신(告身)은 문구 관원의 임명장(任命狀)으로 크게 4품 이상에게 국왕이 직접 내린 ;교지(敎旨)‘와 왕명을 받들어 이조(吏曹 : 문관 임명)와 병조(兵曹 : 무관 임명)에서 내린 ’교첩(敎牒)‘으로 나뉜다. 또한 조선왕조는 외명부(外命婦)라 하여 문무 관원의 처(妻)나 모(母) 등에게도 품계를 내렸는데, 이때에는 남편이나 아들의 품계에 준하였다.
    이밖에 과거 합격자에게 내린 합격증도 교자라 하였는데, 문˙무과 급제자의 경우 붉은색 종이를 사용하였기에 ’홍패(紅牌)‘라 하였고, 생원(生員)˙진사(進士) 및 잡과(雜科) 입격자의 경우 흰색 종이를 사용하였기에 ’백패(白牌)‘라 구분하기도 하였다.
  • 여기에 전시되는 자료의 시간적 범위는 55년간(1845~1900)으로 당시 안산군수였던 권용정(權用正)이 헌종 11년(1845) 관곡지에 연지기를 두고, 이들에게는 일체의 역(役)을 부과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경기도 관찰사 이계조(李啟祚)에게 보고하여 허가를 받은 ’안산군수 서목(安山郡守 書目)‘과 이로부터 시간이 지나면서 연지기에게 각종 잡역을 부과하는 폐단이 생겨 연못 관리가 소홀해지자, 연지기의 면역을 재확인하기 위해 고종 20년(1883) 안산군에서 발급한 ’안산군 완문(安山郡 完文)‘, 그리고 광무 4년(1900) 안동 권씨 문중의 권태선(權泰善)이 자금을 마련하여 관곡지의 진흙을 준설한 사실을 기록하여 전한 ’연지준지기(蓮池浚池記)‘ 등 3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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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곡지 관련 고문서 - 연도, 제목, 내용, 발급자, 수급자
연도제목내용발급자수급자
헌종 11년(1845) 安山郡守 書目
  • 황폐해진 관곡지를 정비하기 위해 연지기 6명에 대해 면역(免役)함을 보고
  • 그대로 시행하라는 답신(초서 부분)
安山郡守
權用正
京畿道觀察使
李啓朝
고종 20년(1883) 安山郡 完文
  • 연지기의 잡역 부과 금지를 재확인
安山郡 該 洞
광무 4년(1900) 蓮池浚池記
  • 종중 선산의 나무를 베어 500냥을 마련,‘관곡지’를 준설한 결과를 기록
權泰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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